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피그만 침공 (문단 편집) == 배경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정권 말기인 1960년 3월 [[백악관]]과 [[미국 중앙 정보국|CIA]]에 의해 [[브루투스]]라는 작전명으로 계획되었다. [[마이애미]]에 거주하던 약 1,500여 명의 쿠바 망명자들을 모아 부대를 창설해 명칭을 '''"2506여단(Brigade 2506)"'''이라고 짓고 [[친미]] 군사정권[* 이 정권은 [[미국 중앙 정보국|CIA]]가 지원한 [[쿠데타]]로 집권한 정권이었다. [[바나나 공화국]] 참조.]이 있었던 [[과테말라]] 모처에 위치한 비밀 캠프에서 군사 훈련을 시작했다. 다만 그 해 5월에 발생한 [[U-2 격추 사건]]으로 인해 아이젠하워는 외교적으로 궁지에 몰리면서 브루투스 작전에 대한 실행 의욕을 잃었다. 때문에 당시 부통령이었던 [[리처드 닉슨]]이 작전을 진행하였으나 이미 임기 말이 다가와 작전이 실행에 옮겨지지는 않았다. 아이젠하워 정부가 끝나고 신임 대통령으로 [[존 F. 케네디]]가 당선되며 훈련 중이던 1,500여 명의 게릴라는 그대로 [[실미도 사건]] 꼴이 나는가 싶었으나 이 작전은 CIA뿐만 아니라 국무부와 [[미합중국 국방부 청사|펜타곤]]까지 개입되었다. [[매몰비용|지금까지 쓴 비용과 끌어모은 전력]]을 이대로 날려 버릴 수는 없었다. 케네디는 외교적 위험 부담이 큰 이 작전을 탐탁치 않게 여겼다. 그러나 노회한 인상의 전임 대통령 아이젠하워에 비해 무언가 믿음직스럽지 못한 애송이 같다는 평가를 단번에 떨칠 정도의 탁월한 업적을 쌓아 올리고 싶었던 케네디는 쿠바에 침공군이 상륙하면 쿠바 국내의 호응이 있을 것이란 CIA의 호언장담만 믿고 작전을 승인했다. 사실 배경은 또 하나 더 있다. 피그만 침공이 1961년 4월에 시작되었는데 그 해 3월에는 군부에서 더 정신 나간 작전인 [[노스우즈 작전]]을 올린 것이다. 케네디 입장에서는 노스우즈 작전보다는 차라리 피그만 침공 쪽이 훨씬 제정신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